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28 건국대학교 항쟁 (문단 편집) == 설명 == 애학투련 결성식 자체는 군부 독재정권 시절 일상적이었던 민주화 시위였으나, 사전에 정보가 경찰에 새어나갔고 이 기회로 [[학생운동]]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경찰이 의도적으로 농성을 유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쉽게 말해, 처음부터 해산이 아닌 전원 연행을 목적으로 학생들을 건물 안에 몰아넣었고 대치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언론에 '그림'이 나오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당시 경찰 병력에 쫓긴 학생들은 그 넒은 건국대학교 캠퍼스 안에서도 학생회관, 교양학관, 도서관, 본관, 사회과학관 5개 건물에 흩어져서 농성에 들어갔다. [[http://archives.kdemo.or.kr/PhotoView?pPhotoId=00755235|당시 현장사진]] 경찰에선 도시 한복판에 [[해방구]]를 건설하기 위한 좌경용공분자들의 조직적인 봉기라는 식으로 발표했지만, 정작 이들은 쌀 한 톨, 라면 한 봉지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운동권]]은 일정한 전술에 의해 움직이고, [[농성]]을 하려면 지휘부를 비롯한 조직원들이 식량이나 물 같은 것을 어느 정도 준비하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당시 농성에 참가한 그 누구도 이러한 준비를 하지 않았고, 결국 학생들은 건물 1층 매점 문을 뜯고 가진 돈을 털어서 적당히 탁상 위에 올려놓은 뒤 과자를 꺼내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런 농성은 국내외의 관심이 일어날 만한 장소를 선택해서 사전에 감옥행을 각오한[* 때문에 이들은 사전에 비장한 각오로 구속결의서,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을 써서 지도부에 맡기고 나가곤 했다. 그리고 이런 결의서를 가지고 '##의 뒤를 잇자' 식으로 또 다른 사람들을 조직하는게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소수의 인원이 기습적으로 점거해서 짦으면 몇십 분 길어야 2, 3일 버티는 게 당시 운동권의 전술이었다. 1984년 [[민정당사 점거 농성]][* 한 시간 만에 모두 체포됐다.],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이때는 미국 문화원이란 특수성 때문에 경찰에서 강제 진압을 망설였고, 결국 72시간 후 맞은편 건물의 롯데백화점에서의 남북적십자 회담으로 해산했다. 북한 관계자가 농성장을 향해 손을 흔들거나 지지 발언 하는 날엔 모두 망하는 것이기 때문. 그 때 대북 적대의식이 높은 걸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등이 대표적으로 수십 명 규모의 학생들이 기습적으로 건물에 진입해서, 내·외신기자들이 모이면 [[현수막|플래카드]] 내걸고 구호 외치다가 경찰에 끌려 나와서[* 투쟁의 결의를 보여준다고 끌려 나오면서도 구호를 외치다 경찰한테 두들겨 맞곤 했다.] 감옥행. 현실적으로 수천 명 규모의 그것도 해방구라고 칭할 정도의 장기 농성을 준비할 역량도 의지도 없던 시절이다.[* 사실 우리나라 학생운동사에서 천 명 단위의 장기농성을 사전에 준비한 적은 한번도 없다. 경찰 진압에 쫓겨서 강제 농성이 된 경우는 많지만. 대표적인 게 1996년 [[연세대 사태]]다.] 때문에 도시 해방구, 사전에 조직된 머시기 경찰 발표는 헛소리다. 2002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출연한 애학투련 간부는 '찬바람 부는 10월달에 학생 수천 명 모아놓고, 농성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우린 덫에 걸린 거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 기간 중인 10월 30일 정부가 '북한이 [[금강산댐]]을 만들고 있는데, 이거 200억 톤의 물로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는 [[수공]]용이다'라는 날조 발표를 하고 당시 방송사에서 금강산댐 수공관련 특집방송까지 했었다. 당시 집권하던 [[전두환]]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장이던 [[장세동]]이 이것을 이용해서 민주화운동을 막고, 정권유지를 하기 위해서 이것을 주도했다. 이로써 '북한은 수공위협을 하는데 북한 편을 들고 반정부 데모하는 학생을 모조리 잡아들여라'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종이로 플래카드를 만들고 주변 주민들에게 고래고래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라고 소리쳐 봤자 밖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인천 5.3 운동]]은 그 자체로 소요에 가까운 가두투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역공을 당할 소지가 있었지만, 건대항쟁은 그야말로 경찰과 공안당국이 짜놓은 시나리오에 학생운동가들이 고스란히 딸려들어가서 억울해진 사례가 되었다. 1986년에 있었던 [[운동권]]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